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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이야기

기생충 2019

(스포일러)

영화의 중반부, 쇼파 위 박 사장과 연교를 지켜보는 주체는 누구일까. 부부 자신? 잔디 밭 위 텐트 안에 있는 막내아들 다송? 그도 아니면 쇼파 맞은 편 테이블 아래 숨은 기택(과 자녀들)? 부부가 저질스럽게 여긴 일련의 소재들(팬티와 마약)이 더티 토크의 소재가 됐다는 점을 상기해볼 때 그 신에 숨겨진 풍자와 희화의 의도를 추측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신을 '지켜본 주체'로 영화가 설정한 것은 기택 가족, 정확하게는 기택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영화 <마더>에도 이와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아들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아들 친구 진태의 집에 숨어든 어머니 혜자는 유력한 증거물로 보이는 골프채를 발견한 뒤 나가려다 진태와 그의 여자친구 미나가 들어오는 소리에 급하게 숨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섹스를 목격하게 된다. 이 때 그 섹스신(정확하게는 누군가의 섹스를 숨어서 목격하는 신)이 함축하는 어떤 의미ㅡ이를 테면 <마더>라는 영화 속에 도사리고 있는 성적 긴장과 보편적인 어머니 캐릭터가 가지는 이미지 간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모순적인 에너지ㅡ를 떠나 타인의 섹스를 지켜본다는 영화적 상황은 그 지켜봄을 당하는 이가 느끼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이라는 효과를 만든다. <마더>에서 그 시퀀스는 섹스 쇼트와 혜자의 갈 곳 잃은 눈동자 쇼트의 연결을 통해 의도치 않게 불편한 상황에 처해버린, 도망가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혜자의 딜레마적인 상황을 그려낸다.

<마더>의 위 시퀀스에서 두 사람의 섹스를 엿본 주체가 옷장 안에 숨은 혜자라면, <기생충>에서 두 사람의 섹스를 엿본 주체 또한 테이블 밑에 숨은 기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혜자와 기택이 구체적으로는 다른 상황이었다는 걸 생각해본다면 이 질문에 선뜻 답하기가 어려워 진다. 그러니까 혜자의 경우엔 살짝 열린 커튼 틈 사이로 두 사람을 볼 수도 상황이었지만, 테이블 아래에 경직된 자세로 누워있는 기택은 소리를 엿들을 순 있을지언정, 부부의 모습을 '엿볼 순' 없었다.

<기생충>에서 중요한 변곡점인 한 장면을 언급하며 이 글을 시작한 것은 그 장면의 모순과 과잉이 이 영화에서 느껴진 어떤 불편함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쇼파 시퀀스에서 부부의 대화와 신음의 사운드가 기택이 들은 것이라면, 부부의 구체적인 행위는 기택의 시점이라기 보단 어떤 상상에 가깝다. 또 관객에게 그 이미지를 보여주고자 했던 영화의 선택이기도 하다. 비슷한 상상의 신은 영화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한다. 저택의 지하실에 숨어살고 있을 아버지 기택을 떠올리는 기우의 상상이다. 영화 후반부, 기우는 기택이 보낸 것으로 추측되는 모스 부호를 열심히 해석한다.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생일파티 날 저택의 주인인 박 사장을 죽이고 홀연히 사라진, 영화 속 표현을 따르자면 '증발한' 기택의 모습을 비추기 시작한다.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내레이션이 이어지고 영화는 박 사장을 찌른 뒤부터의 기택을 뒤따른다. 지하실로 숨어든 기택이 기생충처럼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모습들이 보여진다.

이 일련의 장면들의 주체는 기택인 것일까? 나는 그 장면들의 주체가 기우라고 생각한다. 정확히는 기우의 상상이다. 모스 부호를 감지하고 해석한 것이 기우이며 그 해석된 편지의 수신인이 기우다. 또 아버지의 편지 이후 아들이 부칠 수 없는 편지를 쓴다는 것에서 이 엔딩 시퀀스의 주체는 기우라고 할 수 있다. 기택이 보낸 신호를 기우는 어떻게서라도 받아볼 수 있지만, 지하실의 기택에게 기우의 편지는 도달할 수 없다. 기우의 부치지 못한 편지는 '열심히 돈을 모아 그 집을 살 테니 아버지는 지하실에서 올라오기만 하면 된다'는 내용의 내레이션과 상상의 화면으로 구현된다. 이 상상 시퀀스를 위해 긴 시간을 달려온 것처럼 느껴지는 영화의 결말에서 박 사장 부부의 섹스 신에서 느낀 어떤 불편함이 다시 한번 느껴진다. 그 불편함은 이를테면, 이 영화의 2시간에 걸친 모든 운동들이 '반지하'의 기택을 '지하실'에 가두기 위해 작동해온 것처럼 느껴지는 것에서 비롯된다.

영화의 서사적 개연성이나 핍진성, 논리에 대해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기택의 마지막 선택은 그럴 듯 하다. 이미 그의 미래는 문광 가족과 기택 가족이 벌이는 소동극의 자조적인 유머에서 예견된 바이며, 반지하에서 더 아래인 지하로 강등된다는 은유적인 결말은 봉준호의 전작들에서 제기한 문제의식들을 생각해 볼 때 자연스럽다. 나는 여기서 서사의 개연성이 아닌 카메라의 선택을 말하고 싶다. (기택이) 볼 수 없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야 마는 섹스 시퀀스에서의 선택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다시금 (기우가) 볼 수 없는 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야 마는 선택으로 연결될 때, 나에겐 이 영화가 영화를 위해 카메라를 선택하는 영화가 아니라 카메라를 위해 영화를 선택한 영화처럼 느껴진다. 소리를 엿들을 수밖에 없는 기택의 무기력한 얼굴 사이로 집요하게 부부의 섹스 장면을 인서트할 때, 아들이 아버지의 (것으로 추측되는) 모스 부호를 해석하고 그의 상황을 떠올려보다 영원히 이루어질 수 없는 어떤 서글픈 상상을 해본 뒤 마침내 카메라가 여전히 반지하에 앉아 있는 아들의 얼굴을 비추고 말 때, 그 쇼트들의 연결이 관객을 위한 것이라면 '어떤 효과가 성공적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만, '그 선택이 옳았다'고 선뜻 말하기는 두려워진다. 관객이 스크린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야 마는 이 영화에서 본 것은 무엇일까?

본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선, 보았기 때문에 문제가 일어난 어떤 순간을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다송의 생일 파티날, 잔디밭에 발을 디딘 근세가 정확히 케이크를 들고 있는 기정을 향할 때, 초대된 손님들은 소리를 지르며 도망친다. 칼에 찔려 쓰러진 기정을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이는 엄마 충숙 뿐이다. 충숙과 근세의 육탄전이 이어지는 동안 박 사장 부부는 기절한 아들 다송을 데리고 응급실로 향하고 영화는 그 때의 그 순수한 이기심을 붉게 달아오른 기택의 표정을 통해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칼에 찔린 딸 기정을 보며 어쩌지 못하는 아버지로서의 기택과 자신에게 차 키를 던지라고 명령하는 고용주를 쳐다보는 하수인으로서의 기택의 차이는 얼마만큼의 간격일까. 그때 영화의 선택은 근세에게서 난 냄새 때문에 찡그리는 박 사장의 얼굴과 그걸 보는 기택 얼굴 쇼트의 충돌이고 그 충돌이 빚어낸 폭발이 기택으로 하여금 살인을 저지르게 만든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자신과 같은 계급을 살해한 근세와 충숙은 죽거나, 집행유예의 선고를 받음으로써 처벌의 대상이 되지만, 다른 계급을 살해한 기택의 선택은 자살도 자수도 도망도 아닌 반지하보다 더 낮은 지하로 들어가 스스로를 감금하는 것이다. 기택은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을 포기한 채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생각하는 곳에 몸을 숨긴다. 대만 카스테라 가게를 운영했으나 망했으며, 씩씩한 부인이 있고, 지하실에서 누군가에게 간절히 모스 부호를 보낸다는 공통점을 가진 기택과 근세는 하나의 운명공동체 혹은 평행우주처럼 영화 속에 자리한다. 차이가 있다면 문광과 근세가 콘돔을 사용해 자녀를 가지지 않았다면 기택은 충숙과 두 자녀를 두었고 목숨줄이 질긴 아들 기우가 기택이 보낸 모스 부호를 해석해주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영화는 콘돔을 쓰지 말고 나의 신호를 해석해 줄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한다는 이야기인가? 물론 그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기우가 기택에게 쓰는 편지는 서글프게도 기택이 절대 받아볼 수 없는 수신인 없는 편지이고, 기우가 기택을 지하에서 구제할 마땅한 방법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택을 이 지독한 운명 속에 가둬버린 영화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영화 속에서 살인 행위는 총 4번 있었다. 충숙의 문광 살해, 근세의 기정 살해, 충숙의 근세 살해, 기택의 박 사장 살해. 앞 3개의 살인 행위는 살인 의도가 없던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거나(충숙의 문광 살해), 다른 살인에 대한 복수의 목적(근세의 기정 살해, 충숙의 근세 살해ㅡ비록 죽진 않았지만 죽이려는 의도 자체까지 포함시킨다면 근세의 기우 살해(시도)도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이었다면, 기택의 박 사장 살해는 우발적이긴해도 실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박 사장이 앞서 누굴 죽인 것이 아니므로 다른 살인에 대한 복수의 목적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다. 기택의 행위는 실수도 복수도 아닌, 기택이 '본 것'에서 비롯된 인과적 결과물이다. 기택이 자녀들과 테이블 아래에 숨어들어 박 사장 부부의 대화와 섹스를 목격하지 않았다면, 쇼핑 후 집으로 가던 길에 뒷좌석에서 냄새난다는 제스처와 함께 차창을 여는 연교를 목격하지 않았다면, 근세의 냄새때문에 찡그리는 박 사장의 얼굴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기택은 결코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보고 말았고', 살인을 거쳐, 지하실에 가둬지고 말았다.

그러므로 <기생충>은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야 마는 영화임과 동시에 보게 함으로써 인물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영화다. 이 영화에는 유머도 있고 풍자도 있고 비판도 있고 자조도 있고 분노도 있고 허무함도 있지만 그 모든 것보다 더 중요한 자리에, 보는 행위에 대한 열망이 있다. 볼 수 없는 것을 보여주고야 말 때, 보는 것이 이유가 되어 어떤 인물을 지옥으로 빠뜨릴 때, 그 본다는 행위를 무엇보다 강렬하게 원하는 이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2차원 스크린 표면 위에 떠다니는 것들을 '보기 위해' 극장을 찾고, 무언가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관객들. 관객이 <기생충>에서 본 것은 유머이며 풍자이며 비판이며 자조이며 분노이며 허무함이지만, 무엇보다도 '보는 행위'에 대한 (불)쾌감이지 않을까. 내게 이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진 것은 이 영화가 현대 사회의 계급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기 때문도, 인물의 극단적인 감정 변화를 세밀하게 따라가기 때문도 아니라, 볼 수 없는 것을 기어코 보게되는 영화적 쾌감과 봄으로써 살인을 저지르는 인물의 참담한 결말이 주는 불쾌감의 모순적인 공존때문이었다.

이 영화의 포스터 속에서 인물들은 모두 눈을 가린 채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포스터를 다시 보니, 마치 (기택이) 어떤 것들을 보지 않았다면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없었으리라는 어떤 잔인한 예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관객은 무엇을 보았는가. 관객은 기택이 보지 못할 섹스를 보았으며, 기우가 보지 못할 기택의 모습을 보았고, 기택이 미쳐가는 과정을, 기택이 지하실에 스스로를 가둔 모습을 보았다. 나는 이 영화가 작위적이라는 평에는 공감하지만, 작위적이어서 '현실적이지 않다'는 평에는 공감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현실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작위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보여주기 위해 작위를(그리고 어쩌면 현실을) 선택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설정한 목표가 달랐던 셈이다. 그리고 그 '보여주기'에는 봉준호식 유머와 잔인함이 있으며, 이선균의 신경질적인 정색이 있고, 송강호의 새빨간 충동이 있으며, 최우식의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그 선택은 효과적이었다. 기택이 결코 볼 수 없는 박 사장 부부의 섹스신을 관객에게 보여줌으로써 봉준호는 더 잔인해지고, 이선균의 정색은 송강호의 충동을 더 자극적으로 부풀린다. 그리고 기우의 상상 시퀀스의 배치는 최우식의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얼굴에서 어떤 정념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그 선택이 옳았다고는 선뜻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봤기 때문에 살인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 살인을 저지르게 하기 위해 인물이(그리고 관객이) 무언가를 보게 만든 이 영화의 선택에 의문이 든다. 본다는 행위, 그것도 영화를 통해 세상을 보(고 있다고 착각하)는 행위의 본질이 위선적이고 기만적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여러 영화들이 있었다. 그 일련의 영화들 중 일부는 비극적 결말을 통해 안전한 관객의 자리에 있는 스스로에게 되묻게 만들었다.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나는 그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내가 본 것은 내가 감히 알 수 없는 것들이다" <기생충>은 비극적 결말을 위해 보게 만든다. "내가 본 것은 무엇인가?" 나는 이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내가 본 것은 인물을 죽이게 하거나 죽는 것과 다름없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보여주기에 몰두하는 카메라의 욕망이다."

영화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기우의 친구인 대학생 민혁은 기우에게 찾아와 과외를 대신해줄 것을 부탁한다. 4수를 하고도 대학에 가지 못한 고졸 백수 기우에게 '너라면 안심돼서'라는 이유로 자신의 대학생 친구들이 아닌 기우에게 과외를 맡기는 민혁은 대학 재학 증명서를 위조할 것을 종용한다. 그리고 그는 다시는 영화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머리에 돌을 맞고 죽다 살아난 기우의 병실에 나타나지 않으며, IT 재벌 살인 사건을 다루는 뉴스 속 인터뷰이로 등장하지도 않는다. 민혁은 기우의 언어 속에서 유령처럼 존재할 뿐("다혜가 대학가면 진지하게 사귀자고 할 거야"는 반복된 대사, "민혁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어떻게 했을까?"라는 기우의 대사) 다시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민혁의 존재감을 대신하는 건 기우 가족에게 주고간 산수경석이고, 기우는 민혁을 대신하는 산수경석에 귀신 씌인듯 집착한다. 말하자면 민혁은 기우를 세련되게 기만한 뒤 젠틀하게 조종한 셈이다. 이 영화의 작동법이 민혁의 존재와 가깝게 느껴진다. 영화는 영화의 인물들과 관객들을 세련되게 기만하고 젠틀하게 조종한 뒤 민혁처럼 홀연히 사라진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기택과 충숙과 기정과 기우와 박 사장과 연교와 다혜와 다송과 문광과 근세 모두를 다 조금씩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민혁은 아직도 내겐 이해하고 싶은 지점이 없다. 영화 속 많은 인물들 중 민혁을 쏙 빼닮은 이 영화를 그래서 나는 때로 재밌고 때론 영리했다고 말할 순 있지만,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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